칼럼

거룩한 분노

Pastor Lee 2023. 7. 27. 13:29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민수기 25 11)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의 그 긴 시간을 다 마친 후 드디어 이제 가나안 정복을 눈 앞에 둔 시점에 모압 평야에 와있습니다.

 

그리고 한마음 한뜻으로 오직 가나안 정복에 최선을 다해야 할 시점에 놓여진 상황에서 발람의 계략으로 인한 사단의 전략에 무너져 버린 이스라엘은 음행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습니다.

 

민수기 25:1-3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싯딤은 어디 입니까? 바로 가나안에 들어갈 입구입니다.

이제 가나안 정복을 놓고 거룩한 전쟁을 준비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과 미디안 여인들과 행음을 하고 있으니 이를 보고 계실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질투하신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질투로 인한 징계로 염병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해서 백성들의 수령들을 잡아 목메어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염병과 수령들의 죽음으로 인해 난리가 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그런데 어떤 젊은이가 미디안 여자를 데리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보란듯이 자기의 장막에 그 여자를 데리고 들어가서 음행을 저지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때 분연히 한 사람이 거룩한 분노로 일어났습니다.

 

민수기 25 7-8절에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보고 회중 가운데에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사에 들어가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

 

지도자들은 목 매어 죽음을 당하고 있고 모든 백성들은 염병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그 가운데 음행의 현장을 보고도 아무도 일어나서 그것을 막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비느하스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남,녀의 배를 창으로 꿰둘어서 죽입니다.

 

이것이 바로 비느하스의 거룩한 분노라고 합니다.

 

왜 이것을 거룩한 분노라고 할까요?

그리고 그 사건이 왜 카이로스라고 하는 하나님의 때라고 할까요?

함께 묵상해보기를 원합니다.

 

헬라어에 때를 나타내는 단어는 ' καιρός (카이로스)  χρόνος (크로노스) 2 있습니다.

크로노스는 단순히 인간의 역사 속에 흘러가는 시간을 의미하며 카이로스는  기회,순간이란 뜻을 가지고 있지만 또다른 의미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나타난 의미 있는 시간, 특정한 시간을 말합니다.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진노속에서 크로노스의 시간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들 앞에 놓인 것은 죄로 인한 진멸이었습니다.

 

그런데 비느하스의 거룩한 분노는 하나님의 때, 즉 카이로스의 시점이었습니다.

크로노스의 시간 가운데 카이로스의 때를 이끌어온 비느하스로 인해서 온 이스라엘의 염병이 그쳤습니다.

 

그것은 크로노스의 인간의 시간에서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카이로스의 하나님의 때를 통해서 다시 구원의 자리로 돌아가게 된 것을 말합니다.

 

조정민 목사님이 쓰신 책 땅의 시간/ 하늘의 시간을 보면 카이로스의 시간은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하나님 안에서 건져 올려서 영원한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 이 땅을 살아가는 존재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비느하스는 바로 그 크로노스의 시간에서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 살다간 믿음의 사람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이런 비느하스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죄를 보고 분연히 일어서는 사람, 타락한 이스라엘을 깨우는 것처럼 타락한 시대를 깨우는 사람, 남들이 손가락질 한다고 하여도 남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을 위해 거룩한 분노를 터뜨릴 사람,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분노를 멈추게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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